책소개
일본 근대 여성 소설과 페미니즘 소설의 개척자, 다무라 도시코!
자의식에 눈뜬 여성의 자립 의지와 그것을 꺾는 현실의 대립에도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의지를 보여주는 모습들!
당차게 세상을 움직여온 여성 작가들의 품격 있고 당당한 행진, 에디션F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가는, 일본 근대 여성 소설과 페미니즘 소설의 개척자 다무라 도시코(1884~1945)이다. 이 책 『단념』에는 단편 「구기자 열매의 유혹」(1914), 「태워 죽여줄게」(1914)와 중편 「단념」(1910)을 실었다. 다무라 도시코의 작품들은 주인공의 개성이 뚜렷하고, 지금까지도 계속 중요하게 다뤄지는 성폭력, 가정폭력, 불륜, 여성과 일, 동성애를 주제로 하고 있다.
목차
구기자 열매의 유혹
태워 죽여줄게
단념
옮긴이의 말
수록_ 작품의 원제명
다무라 도시코가 걸어온 길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다무라 도시코는 일본여자대학교 국문과를 중퇴한 뒤 학업보다는 작가가 되는 것에 뜻을 두고, 당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고다 로한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그후 낡은 관습을 벗어나지 못한 스승의 지도법과 스스로의 창작 능력에 의문을 품고, 스승 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고다 로한의 문하생이자 선배였던 다무라 쇼교와 결혼했는데, 소설이 팔리지 않아 가난을 벗어나기 어렵자, 다무라 쇼교는 도시코에게 계속 글을 써 돈을 벌도록 압박을 가했다. 남편의 강압 아래 쓴 「단념」이 《오사카아사히신문》 현상공모에 1등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자신은 상금을 목적으로 쓴 소설은 문학작품이 될 수 없다고 부정했지만, 당시 신문에선 일본 최초로 본격적인 여성 작가가 등장했다고 크게 다루었다.
다무라 도시코가 주로 다룬 주제들은 자의식에 눈뜬 여성의 자립 의지와 그것을 꺾는 현실의 대립, 남성과 대등한 입장에서 살기 위해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여성의 절규에 가까운 반항의식 등이었다. 대부분 여주인공들은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자의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자신의 내면을 지배하려는 타인과 사회를 완강하게 거부한다.
“절대 밖에 나가면 안 돼.”
의심으로 가득 찬 집안 사람들의 눈이 지사코의 주변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버지도 지사코가 들에 무엇을 하러 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구기자 열매를 보러 갔어.”라는 말을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집에 있기 싫증 난 지사코가 바깥으로 어슬렁어슬렁 놀러 나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새학기부터 지사코를 다른 학교로 전학 보내자고 집안 사람들은 의논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학교를 쉬기로 했다. 아버지는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게 잘 복습해두어야 한다고 지사코에게 말했다.
지사코는 혼자 쓸쓸히 공부했다. 그런 지사코에게 붉은 구기자 열매의 진짜 유혹이 곧 찾아왔다. 구기자의 붉은 그림자로부터 남자의 손이 점점 진하게 나타나 지사코를 사로잡았다. 지사코는 남자의 손이 닿는 느낌에 확실히 눈뜨게 되었다. 내리누르려는 듯한 손이 점점 커져, 그리운 붉은 열매 위로 점점 넓게 펼쳐지고 있었다.
―「구기자 열매의 유혹」에서
‘하지만 내가 게이지 앞에서 참회해야 하는 것은 아니야. 결코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거야. 그러긴 싫어. 내가 했던 행동도, 남자에 대한 내 사랑도 모두 나의 것이야. 내가 왜 게이지에게 후회하는 마음을 보여주어야 해? 그렇게까지 해서 게이지의 마음을 얻고 싶지 않아.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괜찮은 거야. 그 사랑을 후회하가나 참회할 필요 없어. 게이지로부터 후회하라고 강요당하는 것은 너무도 모욕적이야. 싫어. 나는 어떤 것도 게이지로부터 용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류코의 생각은 점점 묵직하게 마음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집을 나올 때 그렇게나 게이지가 그리웠던 것을 다시 떠올리자 슬픔이 다가왔다.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다. 복수당할 때까지 게이지 옆에서 기다렸다가 가만히 지켜보리라. 어떤 복수라도 감수할 것이다.
―「태워 죽여줄게」에서
도미에는 평소 계모의 처지에 연민을 느꼈고,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때 상경한 그녀를 보자 갑자기 문제라도 생긴 것 같아 성가신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 도미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이 도쿄에 있으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역시 형부에게 의지하고 보호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남자가 아니다. 젊은 여자다. 도미에는 스스로의 처지가 너무나 슬펐다.
다음 날 아침 도미에는 약간 우울한 기분으로 계모를 만났다. 오이요는 도미에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정리해주며, 하오리로 고쳐입을 것과 속옷으로 입을 것 등을 구별하여 말해주기도 했다. 역시 오랫동안 부모 자식으로 지내온 정이 사소한 것에도 드러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미에는 마음이 누그러졌고, 그래서 기뻤다.
―「단념」에서
잇따른 작품 발표 후 침체기가 찾아왔고, 남편 다무라 쇼교와도 더욱 사이가 나빠져 헤어지고, 이때 자신을 도와준 기자 스즈키 에쓰와 함께 캐나다로 건너가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도시코는 스즈키 에쓰와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일본계 이주민 중 여성들의 권리를 확보하는 데 애썼다. 이후 스즈키 에쓰가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다무라 도시코는 충격에 빠지게 되고, 다양한 인생 부침 속에 중국 상하이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62세에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다무라 도시코는 작품마다 특유의 관능적이고 탐미적인 정서를 살려내고, 다양한 연모의 감정을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펼쳐내 대중적 인기를 끌 만한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다. 여성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욕망들에 대해 섬세하고 솔직하게 다루었으며, 개방적인 시각으로 거침없이 다가간 작품을 많이 썼다. 예를 들어, 동성인 후배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는 여자, 형부와 아슬아슬하게 육체적이고 감정적인 줄타기를 하는 처제, 남편이 아닌 남자를 향해 정열을 태우는 유부녀, 가는 곳마다 남자에게 반하는, 남자 없이는 못 사는 여자 등의 다양한 욕망을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묘사하고 있다.
‘현모양처가 되어라. 앞으로 절대 나서지 말라’고 여성에게 강요하던 시대에 어떻게 이런 작품을 썼을까, 정말 자유로운 영혼으로 태어난 분이구나, 하고 번역하는 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답니다. (…)
다무라 도시코의 몇몇 작품들엔 「단념」을 쓰게 된 배경과 작품을 둘러싼 남편과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나옵니다. 「단념」은 안타깝게도 소설을 써서 돈을 벌라고 압박하는 남편의 눈치를 보며 쓴 작품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일본 문학사에서 ‘동성애 문학의 효시’로 손꼽히는 수작입니다. 당선 심사평에서도 ‘탐미적이고 관능적인 세계를 그린 점이 돋보인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_「옮긴이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