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슬픔과 슬픔이 버무려 낸 알싸한 겉절이 같은 인생의 맛!
이공계를 공부했으나 인문의 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작가 전현서의 첫 소설집
2021년 한국소설에 단편소설 「스틸」 당선.
2022년 한국소설 신예작가.
2022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사업 선정.
문장과 구성의 근간이 섬세하면서도 품격 있고 주제 또한 선명해 독자를 작품 속 화자의 상황 속에 꼼짝없이 묶이게 하는 이야기들. 표제작 「탱고」와 「춘하추동 밥집」 등 단편 6편과 「지제」 등 짧은 스마트 소설 2편이 수록된 전현서 작가의 첫 소설집.
화학공학을 전공한 그가 지천명이 지나 인문의 세계로 진입하여 정성껏 써 내려간 8편의 이야기가 있다. 그의 작품을 대변하는 인물들은 낮고 어두운 곳에서 눈에 띄지 않지만 자기만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간다. 사람과 사람에 대한 울림 깊은 이야기를 읽은 당신께서는 한동안 침묵에 잠기다 결국 눈가를 훔치고 말 것이다.
목차
탱고_ 009
스틸_ 040
춘하추동 밥집_ 074
숨은그림_ 105
보파김밥_ 119
푸른 옷소매_ 157
올드 브리지_ 187
지제_ 214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모든 생의 고통을,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을 겪은 후에도 함께 걸어갈 수 있다고, 그러니 같이 가자고 쉼 없이 우리를 설득하는 이야기
「탱고」의 홍련은 부침 많은 생을 건너와 예순둘, 노년의 길목에 있다. 일하던 식당에 손님이 줄어들자 그만 나가달라는 주인 여자의 통보를 받은 그는 가장 좋은 옷으로 멋을 내는 자존심이 살아있는 여자다. 그녀 곁에 남은 건 위로 삼아 마시는 소주뿐이다. 그러던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 탱고가 손짓한다. 전봇대에 붙어있던 광고문구에 혹해 그것을 떼어온 홍련. 통장은 비고 손이 떨려 일할 곳도 찾기 어려운 그녀는 탱고를 맞이할 여유도 없이 새로운 사명에 눈뜬다. 혼자 사는 옆방 노인을 돌보는 일, 누군가 부탁하거나 시킨 것도 아니다. 시들어가는 노인의 생에 연민을 느꼈을 뿐. 이발소에서 함께 일하던 영춘이 전화를 걸어 넋두리하면 “외롭지 않은 인생 없다”라고 홍련은 말하곤 했다. 노인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덥수룩한 수염을 보며 바로 그 감정, 연민을 느낀 것이다. 홍련은 좋아하는 소주의 유혹마저 물리치고 면도칼을 사기 위해 골목으로 나선다. 노인의 삶이 단정하게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그녀의 발걸음이 탱고를 추듯 사뿐사뿐하다.
「스틸」에는 대도 마공수가 있다. 도루왕인 그였지만 경기의 행운을 위해 동료의 사물함에서 5만 원권을 스틸하는 불안한 마음의 소유자. 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야구 선수로 성장하는 동안 일찍부터 집을 비웠던 아버지는 “남자라면 당연하지. 강해야 해.”라는 말로 마공수를 단련시켰다. 무자격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아들이 되기 위해 마공수는 쉼 없이 달렸다. 원망과 경멸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간 마공수는 훔쳤던 오만 원권을 소지해 날리는 것으로 진정한 도루왕이 되기로 다짐한다.
야구에서 스틸(steal)은 도루를 의미하지만, 다른 철자를 쓰는 또 다른 스틸(still)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고요한’ 등으로 해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에는 삶의 길에서 맞닥뜨리는 숱한 고난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소설 「스틸」은 작가가 우리에게 건네는 응원이다. 이루지 못한 목표가 있더라도, 그 길을 향해 나아갈 때 갖은 고난이 닥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끝까지 걸어가는 우리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러고 나면 언젠가는 ‘고요함’ 속에 안주할 수 있을 것이다.
혼자된 어머니가 나(은경)를 키우며 운영하던 「춘하추동 밥집」, 엄마 강심덕 여사는 빨갛게 칠한 손톱으로 겉절이를 무치며 아저씨들의─그 가운데 대원 아저씨가 있었다─시선을 단숨에 잡아끌었다. “동네 아줌마들이 우직하게 곰삭은 맛을 낼 때, 가볍고 산뜻한 맛으로 승부를 낸 사람이 엄마였다.” 젊은 날 넘치는 매력을 가졌던 엄마는 이제 나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나에게는 나보다 내 생일을 먼저 챙겨 축하 문자를 보내는 근수 형이 있기에 나는 엄마에게 내년 봄에 피는 꽃을 꼭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준다.
술래잡기를 하자며 꽁꽁 숨어버린 할머니가 말했다. “무언가를 잘 찾는 사람들”은 “아주 섬세하고 선한 사람들이어서 믿어도 좋다”고, 그러니 이야기 속 나는 ‘마음 놓고 숨을 수 있어야 한다’며 자신이 잠드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숨은그림」, 결혼해 한국으로 왔던 베트남 이주 여성의 아들인 나 안동훈. 아빠의 뒤를 이어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남겨진 동훈은 할아버지와의 길고 긴 불화를 끝낸다. 그 화해의 밥상에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엄마의 김밥 레시피, 「보파김밥」이 있다. 돌아가신 부모를 대신해 나를 키운 언니가 육십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뒤 상실감과 외로움에 갇혔던 내가 언니의 옷을 보며 가슴 무너지는 슬픔이 아니라 다음 생의 행복을 기원하며 진정한 애도에 다다르게 되는 「푸른 옷소매」, 죽은 아내가 눈앞에 나타나서 일상을 함께 하게 되고, 화자인 나는 독일로 출장을 가 「올드 브리지」에서 한 노인을 만난다. 한국을 좋아해서 한국으로 갔던 노인의 손녀는 화자인 나의 아내처럼 공연장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노인과 나는 여러 말끝에 겨우 손녀에 대해 말하고 노인은 말한다. “그래도 삶은 이어지지요. 누군가 또 태어나 자라고, 누군가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고… 우리 인간은 쉬지 않아요.”라고. 죽었던 사람이 다시 돌아와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죽음이라는 말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화자인 향나무관(棺)이 자기 품에 누운 사자(死者)와의 대화를 통해 삶이 무엇인지, 떠나는 사람은 어떻게 떠나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지제」가 있다. 『탱고』 속 8편의 이야기에 들어있는 죽음은 호흡의 멈춤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요와 침잠의 시간 이후 다시 날(生) 새로운 세상으로 연결되는 또 다른 출발점─굳이 윤회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이라고 말하고 있다. 죽음은 단지 하나의 문이 닫히고, 또 다른 문이 열리는 것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작가의 말
살면서 나를 돌아볼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습니다. 지나간 일에 붙들려 끌려다니거나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누우면 바람처럼 흩어져 버린 하루가 너무 아까웠지만, 내일은 좀 더 나은 날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곤 했습니다. 그렇게 지나온 하루하루가 쌓여 어느새 60년 가까운 세월이 되었습니다. 가끔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꿈을 꾸는가, 하는 짧은 상념에 머물기도 했는데 여전히 그럴듯한 답은 찾지 못했습니다. 눈길이 가는 곳, 마음이 닿는 곳을 기웃거리다 야금야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동안 써 두었던 글을 모아 첫 소설집을 냅니다. 두렵습니다. 두려움을 떨치려 소설 속 인물들을 한 명씩 소환해 봅니다. 살면서 만났거나 스쳐 간 오랜 인연들을 면면이 떠올립니다. 더러는 작은 오해로 소원해지기도 했고 생각지 못했던 감동으로 나를 눈물짓게 했으며 삶의 고비마다 묵묵하게 손을 잡아주던 그들, 내 삶 속으로 들어와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는 머물거나 지나간 사람들이 소설 속에 있습니다. 나의 순수한 독자들은 궁금해할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소설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이 실화냐고 말입니다. 직접 겪은 것인지 몹시 알고 싶어합니다. 간단하게 답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