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너무 눈부신 어둠 속에서,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과
잃어버리고 있는 것과
앞으로 잃어버릴 것들을
별자리처럼 이어 보았다.
림LIM 젊은 작가 소설집 네 번째!
하나로 결속되는 대신 어디로든 흩어지겠다는 결심이자,
어느새 몸속으로 들어와 있는 세계에 삶의 흐름을 내맡기기로 하는 첫걸음
‘림LIM 젊은 작가 소설집’은 여기, 젊은 작가들의 신작을 모아 일 년에 두 권 선보인다. ‘-림LIM’은 ‘숲’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이자 이전에 없던 명사다. 1호 『림: 쿠쉬룩』(천선란 외 6인), 2호 『림: 초 단위의 동물』(서이제 외 6인), 3호 『림: 옥구슬 민나』(현호정 외 5인)에 이어, 문학웹진 LIM에 연재하며 사랑받은 다섯 편의 신작을 네 번째로 모았다.
『림: 잃기일지』에는 김서해, 박소민, 이선진, 최미래, 한요나 작가와 정우주 문학평론가가 함께한다. 상실과 결핍을 계기로 한데 모여 싸우고, 흘러가며, 세계를 끌어안는 이들의 이야기. 하나로 결속되기보다 어디로든 흩어지겠다는 결심이자, 어느새 몸속으로 들어와 있는 세계에 삶의 흐름을 내맡기기로 하는 첫걸음.
다섯 소설 속 존재들은 자신의 중심을 잃고 미끄러짐으로써 다시 조직되며, 그 변형이 남긴 자국과 흔적을 만져 보고, 끝내 중첩되는 이질화를 생의 조건으로 삼아 ‘나’보다 남에 더 가까운 스스로와 관계 맺고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목차
김서해 · 손가락이 미끄러지듯이
박소민 · 지옥에 갈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이선진 · 잃기일지
최미래 · 돼지 목에 사랑
한요나 · 심곡
작품 해설 | 정우주 · 내 안에 세계를 아로새기기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마음에도 혈관이 있다면, 그건 뭐야-
무엇을 운반해서 어디로 보낸단 말이야-
사람 마음에 꼭 있어야 하는 감정이 있고,
그게 흘러 다니는 통로가 있다면,
그건 대체 무엇일까.
- 김서해 「손가락이 미끄러지듯이」
동성혼이 합법화된 근미래, 예순일곱의 나이인 ‘나’ 순영은 뉴스를 통해 소식이 끊긴 지 오래인 오빠 희준이 동성 연인과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함께 뉴스를 보던 고령의 부모님은 오빠의 소식에 분노와 반감을 드러내고, ‘나’의 딸과 손녀는 그런 노인들에게 반감을 보인다. 그 가운데에 끼인 ‘나’는 오빠를 찾아 집에 데리고 오라는 아버지의 전언과, 왜 이제 와서 삼촌을 괴롭히냐는 딸의 반문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사실 ‘나’는 “다 그렇게 산다”는 말을 위로 삼아 타인과 달라 이해가 요구되는 부분들을 정상의 둘레에 맞춰 잘라 내며 살아온 인물이다. 그러나 혼란 속에서, 나는 그동안 “우리”라고 여겼던 보편적 동일성의 원을 의심하기에 이른다. 손가락이 미끄러지듯이, 곁을 비껴가는 기억들을 되짚으며. 무언가 “흘러 다니는 통로”로써의 마음으로, 이 세계를 보다 투명하고 유연하게 감각해 보려고.
1차원의 선도 아니지만
2차원 평면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어느 중간 형태.
내가 사는 세계의 법칙이랑 안 맞는 것 같을 땐,
그냥 0.3차원쯤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해.
나를 위한 새로운 차원을 만드는 거야.
나를 설명해 주는.
- 박소민 「지옥에 갈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이제껏 죽은 사람들의 집을 치우는 일을 해 온 솔은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한 영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머무른 방을 찾아 “똥밭”이라 불리는 농막으로 향한다. 먹고살기 위해 학교 대신 죽은 사람들의 집으로 등교하는 솔, 이름 대신 사배자로 불리는 해주, 소리를 내지 않으려 숨까지 참으며 살아가던 영, 학교에서 왕따의 위치에 내몰린 수학 선생, 네 사람은 원의 내부이지만 동시에 삼각형의 외부인 영역으로 밀려난다. 소설은 “유클리드 기하학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존재들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 내고자 “프랙털”이라는 기하학적 개념을 일종의 측량법으로 빌려 오며, 도려내진 대상을 다시금 세계에 새겨 넣음으로써 결코 평면으로 단순화될 수 없는 복잡한 곡률의 세계에 가까이 가 닿아 보고자 한다.
감은 눈 속에서 한 번 더 눈을 감으면
블랙홀처럼 새까만 침묵이 몰려와 혼자 남은 내 곁을 지켜 주었다.
너무 눈부신 어둠 속에서,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과
잃어버리고 있는 것과 앞으로 잃어버릴 것들을
별자리처럼 이어 보았다.
- 이선진 「잃기일지」
어린 시절 엄마를 잃고 혼자 남은 ‘나’는 마치 세상에 없는 사람인 듯 침묵의 덫을 놓아 먹고살던 엄마의 방식을 물려받아, 침묵 뒤에 웅크림으로써 스스로를 세상에서 지워 내고자 애쓴다. 그러나 처음 만난 펄로부터 다짜고짜 “너, 너무 시끄러워”라는 말을 건네 들은 ‘나’는 꼭 피격을 당한 양 “그 애 쪽으로 기울어”진다. 이렇게 자기를 보호하려는 둥근 “침묵”과 상처 입히는 예리한 “피격”이 되풀이되는 존재의 테두리는 끝없는 재구축의 장으로 내맡겨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어느 한쪽이 승리하는 결말 대신 결코 완결될 수 없을 투쟁을 계속하는 분투기이다.
패스, 패스, 패스, 전력 질주.
미진은 달렸다. 경기장 끝에서 끝으로.
찌릿찌릿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꼬리 끝까지 전해져.
누군가 내 양 끝, 그러니까 머리카락과 꼬리를 잡고
바짝 잡아당기는 기분.
- 최미래 「돼지 목에 사랑」
미진은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집착한다. 그저 그런 사랑이 아닌 “제대로 된 사랑”을 하고 싶은 미진의 마음은 단순한 소망이라기보다 “살면서 한 번은 꼭 해 봐야만 하는” 목적에 가깝다. 다만 소설에서 이렇듯 미진이 “사랑에 목매는” 사람이 된 이유는 다름 아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애매한 길이”의 꼬리가 달린 미진의 몸 자체와 관련한다. 미진은 지금껏 딱히 쓸모는 없으나 그다지 불편하지도 않은 꼬리를 “별 뜻 없이 달고 살”아 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꼬리는 미진을 우습고 만만하며 쉬운 상대로 보이도록 하는 “이상한 거”가 된다. 하지만 미진의 꼬리가 가진 의미가 반전되는 사건이 생기며, 미진은 끝내 그 가치와 쓸모를 알 수 없는 꼬리를 단 몸으로써 세계와 다시금 새롭게 관계 맺는다.
치유 받고 싶었어.
영원히 고장난 채로 사는 게 아니라
회복할 수 있다고.
인간은 회복하는 존재라는 걸
확신하고 싶었어.
- 한요나 「심곡」
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중년의 교수 모립과 오피스 로보인 로티는 우연한 계기로 캠퍼스에서 만나 파트너십을 맺는다. 끊임없이 본인의 몸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는 모립과 누구보다도 끈질기게 모립에 대해 궁금해하는 로티는 “로봇은 로봇의 자리에서, 인간은 인간의 위치에서 살아가면 된다”는 원칙이 무색하게 오히려 서로의 영역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 보인다. 이렇게 비인간과 인간, 두 화자에 의해 번갈아 서술되는 이 소설은 “출발점에 놓인 몸이 점차 시간과 기억에 따라 변형되면서 자신이 환경 속에 뿌리내려 있는 존재임을 이해해 나가는 여정”을 그린다.
“이것은 어느 한쪽이 승리하는 결말 대신
결코 완결될 수 없을 투쟁을 계속하는 분투기이다.”
『림: 잃기일지』의 소설 속 인물들은 ‘나’를 감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에 난 작은 구멍으로 무언가를 잃어버리고(「잃기일지」), 안으로 들어가려 하면 할수록 그 둥근 테두리로부터 자꾸만 미끄러진다(「손가락이 미끄러지듯이」). 그리하여 이쪽도 저쪽도 아닌 문지방을 밟고 선 ‘나’는 정확히 어디부터 시작되어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꼬리’를 단 몸으로서 어디로든 흘러가기 시작하며(「돼지 목에 사랑」), 출발점에 내맡겨진 몸은 시간과 기억 속에서의 변형이 각인되는 물질적 장으로서 스스로를 위치시킨다(「심곡」). 그렇게 환경 속에 뿌리박힌 신체는 그가 기입된 세계의 틈새를 벌려 울퉁불퉁한 자국과 흔적을 가까이 더듬음으로써 끝내 자기의 내부로 세계를 끌어들인다(「지옥에 갈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그리하여 다섯 소설 속 존재들은 자신의 중심을 잃고 미끄러짐으로써 다시 조직되며, 그 변형이 남긴 자국과 흔적을 만져 보고, 끝내 중첩되는 이질화를 생의 조건으로 삼아 ‘나’보다 남에 더 가까운 스스로와 관계 맺고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이는 하나로 결속되는 대신 어디로든 흩어지겠다는 결심이자, 어느새 몸속으로 들어와 있는 세계에 삶의 흐름을 내맡기기로 하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