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삶에 고통이 없었다면, 문학을 껴안지 못했을 것이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한국 문학사에 남긴 또 다른 걸작
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아우르며 격변하는 시대 속 한민족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 대하소설 『토지』. 한국 문학사에 다시없을 걸작을 남긴 작가 박경리의 장편소설이 다산책방에서 새롭게 출간된다. 원전을 충실하게 살린 편집과 고전에 대한 선입견을 완벽하게 깨부수어줄 디자인으로 새 시대의 새 독자를 만날 준비를 마친 이번 작품은 『녹지대』이다. 이 소설에는 한국 전쟁이 끝나고 폐허와 상처가 가득했던 1960년대 서울의 명동 거리를 배경으로, 경제적 풍요를 누린 적도 없고 현실을 변혁할 능력도 없는 ‘한국의 비트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입체적이고 개성 있는 여성 주인공 하인애와 그를 둘러싼 여러 인물은 그 시대의 고독한 군상으로 각각의 인생에서 모두 우왕좌왕하고 있으나, 작가 박경리는 갈피를 못 잡는 이 전후 세대 캐릭터 모두를 단순화하지 않고 “진짜, 인간”으로 정성스럽게 빚어낸다. 각자의 청춘을 통과하며 자신의 내면과 조우하는 이들의 삶을 통해, 비극적 현대사와 가족사를 겪고도 치열한 생활 속에서 글을 써내려 간 서른여덟 살 작가 박경리의 흔적 또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1. 비 오는 거리
2. 시화전
3. 무너지지 않는 성
4. 비는 내린다
5. 여름밤
6. 비틀어진 얼굴
7. 강이 보이는 곳
8. 여름은 가고
9. 뒷거리
10. 서로 이해 못 한 채
11. 동요
12. 이상한 그림자
13. 의상
14. 바람 따라 간 사람
15. 종장
작품해설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제 삶이 평탄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삶이 문학보다 먼저지요.”
고전의 품격과 새 시대의 감각을 동시에 담아낸
박경리 타계 16주기 추모 특별판
1955년 단편 「계산」으로 데뷔해, 26년에 걸쳐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로 한국 문학사에 거대한 이정표를 남긴 거장 박경리. 타계 16주기를 맞아 다산북스에서 박경리의 작품들을 새롭게 엮어 출간한다. 한국 문학의 유산으로 꼽히는 『토지』를 비롯한 박경리의 소설과 에세이, 시집이 차례로 묶여 나올 예정인 장대한 기획으로, 작가의 문학 세계를 누락과 왜곡 없이 온전하게 담아낸 의미 있는 작업이다. 이번 기획에서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중추를 관통하는 박경리의 방대한 작품들을 한데 모아 구성했고, 새롭게 발굴한 미발표 유작도 꼼꼼한 편집 과정을 거쳐 출간될 예정이다.
오래전에 고전의 반열에 오른 박경리의 작품들은 새롭게 읽힐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번에 펴내는 특별판에서는 원문의 표현을 살리고 이전의 오류를 잡아내는 것을 넘어, 새로운 시대감각을 입혀 기존의 판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책을 선보인다. 이전에 박경리의 작품을 읽은 독자에게는 기존의 틀을 부수는 신선함을, 작품을 처음 접할 독자에게는 고전의 품위와 탁월함을 맛볼 수 있도록 고심해 구성했다. 이전의 고리타분함을 말끔하게 벗어내면서도 작품 각각의 고유의 맛을 살린 표지 디자인으로, 독서는 물론 소장용으로도 손색이 없게 했다. 한국 문학사에 영원히 남을 이름, 박경리 문학의 정수를 다산북스의 기획으로 다시 경험하길 바란다.
“나를 기른 것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바람이 기른 아이다.”
허황된 마음을 쫓고 슬픔에 매몰된 패배자들
그들이 넘실대는 1960년대 서울의 명동 거리
박경리의 장편소설 『녹지대』는 1960년대 서울 명동에 있는 ‘녹지대’라는 이름의 음악 다방에서 시작된다. ‘녹지대’에는 음악, 문학, 철학 등 예술과 삶에 관해 고뇌하는 ‘한국식 비트족’ 젊은이들이 모여드는데, 이중 몇몇은 ‘녹지대’라는 동인회를 만든다. 그중 단연코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소설의 주인공인 하인애다. 노랗고 짧은 머리에 선머슴 같은 모습의 인애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을 타고나 모두가 선망하는 대상이다. 인애는 돈 한 푼 제대로 벌지 못하는 습작생이지만 두둑한 배짱으로 시화전 찬조금을 얻어내는 인물이자, 방랑벽을 벗 삼아 산과 바다를 떠도는 씩씩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런 인애의 내면에도 슬픔과 외로움이 가득하다. 인애는 한국 전쟁으로 부모를 모두 잃고 작은아버지 댁에서 얹혀 살아온 고아이자, 알 수 없는 사정으로 거듭 인애를 피하려는 김정현과의 애정 관계로 속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와 비애 사이에서도 인애는 빨간 수첩에 시를 쓰고, 비 내리는 쓸쓸한 늦봄의 명동을 걷고, “황홀한 슬픔과 아득한 사랑”을 맛보며, 예술과 인생을 점차로 알아간다.
인애를 둘러싼 여러 인물 역시 그들 각자의 슬픔에서 허우적대고, 또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인애의 친구 은자는 ‘양공주의 딸’이라는 집안 배경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는 박 씨에게 열등감을 느껴 괴로워한다. 결국 은자는 현실에 타협하고 자신을 오래도록 좋아해 온 한철과의 결혼을 결심한다. 어떻게든 인생에서 “비상구”를 찾으려는 인애와 달리, 은자는 “밀폐”됨으로써 생활의 안정과 내면의 평화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내면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계속해 방황하는 인물은 은자뿐만이 아니다. 인애의 작은어머니인 최경순 여사는 평생 동안 남편인 하흥수의 “허황된 마음”을 쫓고자 애를 쓰다 자살까지 시도한다. 게다가 하흥수 씨는 “심술과 이기”가 가득해, 외로움에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아내조차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인물이다. 잘못된 결혼 생활에 몸과 마음이 묶여 되레 습관적으로 여자를 찾는 허무주의자 민상건도 있으며,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기 생활이 부끄러워 계속 자신을 감추고 도망치는 김정현도 있다. 거대한 인파로 가득한 명동 거리에서 어떤 사람들은 텅 빈 마음을 감춘 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가고 있는 얼굴”들이다.
“난 사람과 저와의 공간에서 빚어지는 마음 때문에 시를 써요.
그까짓 흙 부스러기, 그까짓 시 몇 줄, 사람이 있어서 귀중하고.”
무참히 손상된 관계에서 시작되는 예술
타자의 침범으로 확장되는 자아와 인생
『녹지대』에서 눈여겨볼 것은 각자의 인물들이 자신의 삶을 구원하는 방법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 의해 상처받고 고통받는다. 허무로 가득찬 조각가 민상건의 삶을 송두리째 망쳐버린 것은 그의 전 부인이다. 무자비함과 악의만 남은 전 부인은 집착적으로 민상건을 괴롭히며 그의 인생을 장악하려 든다. 민상건이 마음을 둘 곳은 오직 그의 일이자 삶인 조각뿐이고, 그런 이유로 그의 제작실에는 무감각해 보이는 여성의 나체 조각상이 가득하다. “인간에겐 희망도 절망도 가져본 일이” 없는 그에게는 오직 “작품과 나와의 공간이 있을 뿐”이다. 자신의 고통으로만 가득찬 이에게는 타인과의 관계를 쌓아갈 공간이 남아 있지 않다. 그 누구보다 강하던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보다 민상건을 위해 슬퍼하는” 숙배의 애정어린 침범이 없었더라면, 그는 여전히 자신의 제작실 안에 틀어박혀 있을지 모른다.
반면 인애가 고통을 타개해 가는 법은 민상건의 방식과는 다르다. 인애가 시를 쓰는 까닭은 사람 때문이다. 인애는 “사람과 저와의 공간에서 빚어지는 마음 때문에” 시를 쓴다. 예술가로서 자각하게 되는 “사치스러운 자의식”은 멀리하고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것”, 그래서 “아름답고 순박하며 평화스러운” 것을 찾으려 한다. 머물 곳이 마땅치 않고 수중에 돈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아도 인애는 감을 주워 먹는 가난한 소년에게 차비를 모두 내어주며, 자신의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타인과 사회를 바라본다. 자신이 손상되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 않고 정신을 놓을 듯 김정현을 그리워한 후, 이뤄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애쓰지 않는다. 대신 여전히 뻐근한 마음을 움켜잡고, 원고 뭉치가 가져다주는 생활감이 “어떤 행복감과 같은”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그렇게 끝까지 인애는 쓰러지지도 않고 꿋꿋이 서 있다.
“내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현실이야.
내일 일은 모르니까 가야 가는 줄 알겠지만.”
좌절과 상처 가득한 시대를 뛰어넘어
새로운 삶의 방향과 의미를 모색하는 자들
『녹지대』는 1964년 6월 1일부터 1965년 4월 30일까지 10개월 동안 연재되었는데, 소설 속 이야기도 연재 기간과 비슷하게 비 내리는 늦은 봄에서 시작되어 여름, 가을, 겨울을 거쳐 다시 봄을 맞이한다. 1년 전 사회의 관습과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여러 인물은 사계절을 보내면서 자신만의 균형점을 찾아내고, 더 나은 삶을 위한 나름의 방법을 택한다. 경순 여사와 하흥수 씨는 지난날의 과오를 덮고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오고, 민상건과 숙배, 은자와 녹지대 동인들은 새로운 미래를 그리며 용기내 한 발을 내디딘다. 그리고 휘어지지도 구부러지지도 않고 단단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인애의 모습도 있다.
작가 박경리는 한국 전쟁을 겪고 폐허가 됐던 1960년대 서울에서 고독과 불안을 겪으면서도 생활을 이어나가려는 이들, 사회적 관습에 괴로워하면서도 또 이에 의지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사랑과 젊음 그리고 예술이 어떻게 버팀목이 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들 뒤로는 “봄옷을 만들어 진열장에 화려하게 장식”하는 양장점의 주인, 어두운 얼굴의 소녀들, 구두창이 닳은 청년들, 호화로운 털 외투를 입은 숙녀들이 “생활하는 모습”이 아니라 “생존하고 있는 모습”으로 걸어 다닌다. 햇볕은 여전히 다사롭고, 무르익은 봄기운은 여지없이 인간들의 삶 사이로 넘쳐 들어온다. 박경리 작가는 이 소설에서 서술자의 목소리를 빌려 “희로애락을 외면한, 언제나 대범스럽고 그래서 무자비한 자연은 그냥 자기 자신의 자리만 지키고 있는데 우왕좌왕하는 인간의 무리에는 참으로 이야기도 많다”고도 말한 바 있다. 모두가 주변부에 머무르며 불안을 껴안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그럼에도 반복되는 계절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우리에게도, 60년 전에 이 쓰인 소설이 새 삶의 탐색과 모색의 가능성을 제공해 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