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맙소사, 이 쿤데라는 어찌 이리 웃기는가, 삶은 또 왜 이리 슬픈가!” 클로드 루아의 이 말만큼 쿤데라의 기구한 삶을, 작가 쿤데라를 잘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삶의 절반 이상을 타향인 프랑스에서 열혈 독자들에 둘러싸여 지냈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고향인 체코의 브루노를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난 사람. 일찍이 자신의 작품 뒤로 사라진 채, 어떤 칸에도 갇히길 거부하면서 그저 “나는 소설가”라고 말했던 사람, 밀란 쿤데라.
이 책은 〈르몽드〉 기자이자 작가인 저자가 오로지 작품으로 자신의 삶을 얘기한 작가 밀란 쿤데라를 찾아 그의 작품 속으로 떠난 문학 산책이다. 저자가 쿤데라의 작품에서 뽑아낸 텍스트들이며 그와 나눈 대화 조각들, 그와의 추억들, 그의 자취를 찾아 떠난 보헤미아 여행 수첩, 많은 사진과 데생 등을 이 책에 모은 목적은 단 하나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한 사람, 우리의 꿈과 거짓말이 어떤 농담을 먹고 자라는지를 부단히 제시해온 이 아이러니와 환멸의 거장을 발견하고 재발견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돕는 것.
목차
- 밀란 쿤데라: “글을 쓰다니, 참 희한한 생각이네!”009
- 감사의 말385
- 옮긴이의 말391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오로지 작품으로 자신의 삶을 얘기한 작가, 밀란 쿤데라의
‘삶의 길, 소설의 길’을 되짚어보다
이 책이 프랑스에서 출간된 건 2023년 7월에 밀란 쿤데라가 타계하기 불과 한 달여 전이다. 쿤데라 부부와 오랫동안 우정을 쌓아온 저자가 ‘작별’이라는 말을 차마 쓰지 못했을 뿐, 실제로는 쿤데라 삶의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안부를 나누며 마무리한 책이다. 쿤데라는 생의 마지막 시기에 이르러, 더는 자기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날 이 책의 저자가 쿤데라 부부를 방문하여 얘기를 나누던 중, 호기심이 발동한 쿤데라가 저자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저기, 밀란, 난 글을 써요….” 그가 놀란 시선으로 바라본다. 재미있어하는 표정도 엿보인다. 그러곤 길게 뜸을 들이고 나서 말한다. “글을 쓰다니, 참 희한한 생각이네!” 밀란 쿤데라의 부인 베라 쿤데라는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도 원제목의 이 말과 같기를 원했다.
〈르몽드〉 기자이자 소설과 전기 여러 편을 발표한 저자는 밀란 쿤데라의 삶의 궤적을 그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되짚어본다. 저자는 “밀란 쿤데라가 나를 신뢰한 것은 내가 작품을 작가와 구별하려 들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고? 그의 책들 아닌 다른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쿤데라의 조각들은 그를 닮은 주인공들 속에 분산되어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파악했다. 그래서도 쿤데라를 제대로 만나려면 그의 작품 속을 산책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기로 여러 상을 수상한 작가임에도 저자는 쿤데라에 관한 이 책을 일반적인 전기 방식으로 구성하지 않았다. 개인의 삶을 앞으로 내세우는 대신, 그의 작품 속 문장을 찾아 인용하고 그것에 작가의 삶을 대입시켰다. 기구하고도 슬픈 삶의 많은 이야기가 그의 책 속에 있고, 때로는 글이 실제 삶보다 앞서 나가기도 했다. 저자가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과거와 현재를 부단히 오가며 쿤데라의 삶과 작품을 이리저리 넘나드는 이 책 곳곳에서 우리는 인간 쿤데라와 그의 작품에 대한 저자의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된다.
저자는 쿤데라의 그늘을 굳이 들춰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것보다는, 뼛속까지 세계 문학?영화?음악?연극?그림?예술의 역사로 빚어진 그가 유럽의 지적 쇠퇴, 문화의 포기, 메말라 가는 예술에 대한 갈증, 추醜의 범람, 미美의 망각 등을 다른 누구보다 깊이 느끼는 그 방식에 관해 얘기하고자 한다. “쿤데라와 비슷한 사람은 쿤데라뿐이다. 쾌활함과 우수가 섞이고, 명쾌함과 모호함이 섞이고, 조롱과 공감이 섞이고, 단순함과 복잡함이 섞이는 이런 혼합은 사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쿤데라가 유쾌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음을, 우정을 매우 소중히 생각했음을 추억한다.
“쿤데라에게 삶의 무게를 갖는 유일한 삶은 작품에 의해 ‘굴절된’ 삶이다.”
예술과 지식이 1순위였던 집안에서 태어나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지도하에 작곡을 배웠고, 대학 진학을 계기로 문학으로 진로를 바꿔 시를 쓰고 희곡을 집필했으나 소설에 집중하게 된, 그로부터 시작된 실총失寵과 유배와 망명의 삶. “체코어를 쓰는 프랑스 작가.” 전 세계에서 번역되어 읽히는 작가임에도 정작 체코인들은 그의 작품을 체코어로 읽을 수 없게 된 작가. 그 어느 곳보다 프랑스에서 최고의 환대와 지적 풍요를 누렸으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향 브루노를 그리워하며 고독했던 사람.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고독의 아우라를 두른” 작가.
여기까지는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우리가 대략 알고 있는 쿤데라의 삶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그는 어떤 대외적 발언도, 어떤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문학사에서 많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 뒤로 사라지고자 애썼으니, 그 자신을 지워버리고자 했던 쿤데라가 아주 특별한 사례는 아닐 수 있다. 그런데 밀란 쿤데라는 좀 더 멀리 나갔다. 그는 후세 사람들에게 아예 살지 않았던 사람으로 여겨지길 원했다. 왜 그렇게까지 생각했을까. 왜 그는 자신이 떠난 뒤엔, 자신의 책들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길 원했을까.
저자가 밀란 쿤데라와 개인적 친분을 맺게 된 것은 〈르몽드〉에 입사하여 책 분야를 담당하면서부터인 듯하다. 기자로서, 기자를 싫어하는 작가와의 만남을 어렵사리 시도해보았다는데, 운 좋게 허락된 그 인연은 수많은 추억을 쌓으며 쿤데라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덕택에 이 책에는 쿤데라 부부와의 우정을 바탕으로, 쿤데라 작품에 대한 깊은 경탄과 이해가 가득 담겨있다. 저자는 쿤데라의 삶은 그의 소설들의 짜임 속에 통합되어, 변형된 모습으로 갈아 넣어져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삶을 작품과 분리하길 원했다고 오해하는데, 그건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 그의 삶의 진실은 바로 소설 속에 있고, 쿤데라에게 삶의 무게를 갖는 유일한 삶은 작품에 의해 ‘굴절된’ 삶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과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 토대라고 믿는 ‘그 신성한 가치들’에 대한 믿음의 거부, 그 순간 시작되는 쿤데라 특유의 유머, 농담의 검은 바닥까지 내려가기, “단 한 마디도 진지하지 않은 소설”을 쓰고자 했던 확고한 의지, 무의미를 사랑해야 하고 그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 독자가 그의 작품들에서 일관성 있게 발견할 수 있는 쿤데라식 삶의 방식들이다.
“한 예술가의 작품이 시작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그 예술가는 언제부터 진짜 그 자신인가?”
쿤데라는 자신의 작품의 범위를 엄격히 규정했다. 그는 십 대시절, 시인 네즈발의 시에서 큰 자극을 받는다. ‘정의의 이상’에 젖은 시인의 시에 경탄하여 열여덟 살 생일에 체코 공산당에 입당하게 되고, 시의 세계에도 동시에 입문한다. ‘시를 통해’ 조국의 새로운 세계 건설 노력에 동참하겠노라 다짐한 그는 그로부터 10년간 공산주의를 믿으며, 열정적으로 시를 쓰고 발표하여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1958년, 서른 살 생일이 막 지났을 즈음, 삶과 예술에 대한 서정적 접근을 영원히 떨쳐버려야겠다고 결심한다. 그가 생각했던 공산주의와 실제 체코 공산주의 사이의 “무한한 거리”를 포착하고 나서다. 이제 그는 천진할 만큼 친공산주의적이라고 판단되는 자신의 초기 시집들을 더는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시들을 쓴 사람 자체와 자신을 더는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는 허물을 벗고자, 극 창작을 시도하고, 4년 사이에 두 편의 극 작품을 탈고한다. 『열쇠의 주인들』과 『농담들』이다. 하지만 훗날 그는 자신의 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들 역시 자신의 최종 ‘작품’에 포함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저자는 이를 두고 “그것들은 그의 ‘작품’이 아니기만 한 게 아니라, 작품의 역사에도 속하지 않는다. 단지 그 ‘전사前史’에 속할 뿐이다”라고 판단한다.
그때부터 이른바 쿤데라의 소설의 역사가 시작된다. 1959년부터 쿤데라는 『열쇠의 주인들』, 『우스운 사랑들』 같은 단편소설을 쓰며 자신만의 음색을 만들어나간다. 이어 그의 첫 장편 『농담』을 출간한다. 1967년의 일이다. 그해 쿤데라는 작가로서 큰 영예를 누림과 동시에, 망명의 삶이라는 긴 역사의 출발점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 ‘농담’이라는 주제는 향후 그의 전 작품의 길잡이가 된다.
평생토록 소중히 여긴 중부유럽의 정체성, 중부유럽의 문학
쿤데라는 평생토록 중부유럽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그가 소중히 여긴 문학은 중부유럽의 문학이다. 체코 땅이 오래도록 속해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부유럽이 아니라, 새로이 독립하여 폐허 위에서 탐구하고 혁신하고 실험하는 중부유럽이다. 그는 정치적 기준으로 체코를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분류한 ‘동구권’이라는 표현을 거부했고, 체코를 서유럽의 전통 속에서, 그 용광로 같은 문화의 심장으로 바라볼 것을 강조했다.
쿤데라가 보기에, ‘납치된 서유럽’은 동구에 병합되고, 흡수되어, 소멸한 서구다. 이 납치는 러시아가 보헤미아 지방을 빼앗았을 때 일어났다. 그는 문화사의 관점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동유럽, 그것은 비잔틴 세계에 닻을 내린 자기 고유의 특수한 역사를 가진 러시아다.” 반면에 보헤미아는?폴란드, 헝가리, 오스트리아 등과 마찬가지로?한 번도 이 동유럽에 속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쿤데라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 체코 문학계에는 로베르트 무질, 헤르만 브로흐, 비톨트 곰브로비치, 프란츠 카프카가 있었다.
평생토록 쿤데라는 자신이 “중부유럽의 위대한 스타 소설가들”이라고 부르는 이 저명한 4인방과 결부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위대한 네 작가에게서 네 가지 공통점을 확인한다. 첫째, 그들 모두 완전히 버려진 세계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건축한다는 것. 둘째, 그 무엇에도 현혹되지 않는다는 것. 셋째, 조소嘲笑를 자신의 무기로 삼는다는 것. 넷째, 모두 절대적으로 현대적이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쿤데라에게서도 그 공통점을 확인한다. 쿤데라가 자신을 그들의 상속자로 느끼며, 평생토록 중부유럽의 정체성을, 아이러니와 유머로 대변되는 ‘진지하지 않음’의 정신을 작품에 담아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작가는 살지 않은 사람이 되고자 해야 한다”
쿤데라의 소설 『불멸』에는 여러 번 되풀이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아녜스의 아버지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거실 탁자 앞에 앉아, 찢어진 사진 더미를 내려다보고 있는” 장면이다. 그는 가족사진을 전부 찢어버린다. 그 주인공처럼, 쿤데라 본인도 말년의 몇 년 동안 자신의 책과 다른 사람들의 책을 낱낱이 찢어버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싶어 했다.
『농담』의 유명한 문장, “모든 것이 잊힐 것이다”처럼 “모든 것이 찢길 것이다”를 손수 집행하는 쿤데라. 그는 자신이 떠난 뒤엔, 그의 책들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나머지 모든 것, 미완성 원고, 사신, 통신, 수첩, 사진 등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후세 사람들에게 살지 않았던 사람으로 여겨져야”만 한다고 했던 귀스타브 플로베르처럼, 쿤데라의 생각도 같았던 듯하다. 그래도 베라 쿤데라가 애쓴 덕택에, 50여 개 국어로 번역된 그의 모든 책, 그의 자료 및 그가 주고받은 편지 일부, 그리고 그의 장서藏書가 찢김에서 살아남았다. 그것들은 모두 작가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 브르노에 새로 마련된 ‘밀란-쿤데라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이제 다행히도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밀란 쿤데라의 어떤 문장, 어떤 말 하나가 뇌리에 아로새겨진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의 조국은 아직 쿤데라를 온전히 받아들이길 거부하지만, 사실은 공산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아니었던 사람, 어떤 칸에도 갇히길 거부하면서 그저 “나는 소설가”라고 말했던 사람, 밀란 쿤데라. 체코와 프랑스로 두 동강 난 채 “프라하를, 브르노를 잊기. 괴로움을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잊기”를 마음속으로 되뇌며 산 삶이지만, 이제 그가 마침내 고향에서 안식을 찾았길 기원한다. 밀란 쿤데라의 마지막 두 말이었다는 “브르노”와 “마민카(엄마)”에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