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의사시인회 결성 12년째를 맞이하여 22명의 의사시인들이 쓴 시집 『씨앗들의 합창』이 출간되었다. ‘환자는 텍스트’라고 다니엘은 말한다. 진단과정을 통해 의사는 환자의 호소와 증상과 검사소견을 살피는 문학적 해석활동을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 ‘진정한 의학은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에 관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시(詩)와 깊이 닿아 있다. 따라서 시와 의학의 융합은 직관, 상상력 그리고 창의적 공감을 바탕으로 서로를 풍부하게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의학과 시가 과학과 예술로 구분되어 각각의 영토에 제각기 놓여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의학과 시의 사이에 놓여있는 고급스러운 구별을 헐어내고 사귀어 서로 오가는 통섭(通涉)의 능력을 갖춘 의사시인의 능동적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목차
서문·5
초대시
마종기·12
이원로·17
박세영
무등산의 희망봉·24
씨앗들의 합창·26
순리는 어디로 가고·28
한현수
꼬막잡이·32
밤마실·33
사월·35
홍지헌
가족여행·38
아주 깊은 곳에·39
뜬금없는 생각·40
정의홍
철둑 길 아래·42
남도 기행 1·43
남도 기행 2·45
김세영
와디의 기억·48
자연스러운 일·51
바람의 결·53
김기준
스파게티가 익어가는 봄날·58
모란을 기다리며·60
마취 의사·62
박권수
만월리 박 씨·66
엄마의 머리빗·67
병아리유치원·68
손경선
괭이밥·72
주꾸미 샤부샤부를 먹다·74
어떤 문답·76
최예환
밤바다에서·78
무스카리 1·79
무스카리 2·81
윤태원
쓰읍·84
내가 사라져도·85
나는 나를·87
김호준
불안 1·90
불안 2·91
어느 집착·92
김연종
비핵화 선언·94
사각지대·96
뼈를 묻다·98
김완
타인들의 집·100
라면을 끓이며·101
우수雨水·103
송명숙
진료 중입니다·106
4월, 봄·107
오후 3시·108
주영만
안과 바깥 4·110
안과 바깥 5·112
안과 바깥 6·114
서화
오감五感·116
기도의 강·117
시초始初와 끝·119
유담
시선의 졸음·122
정기검진·124
겨울 동백·126
김경수
인사하는 책·128
사랑은 떠나가는 기차·130
나무 의자·132
박언휘
사랑의 마그마·136
울릉도의 꿈·138
달밤·140
서홍관
근무는 어때요?·142
소록도 화장터에서·143
기와불사·144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문학 속의 의학, 의학 속의 문학, 진료실의 시인들의 소박하고 찬란한 시편들!
말라 뒤틀렸다 붉디붉게
물들어 펼쳐진 진홍빛 저고리
매웁디 매운 마음을 품고서
노란 꿈을 저미고 저며 야위어도
생이 비틀어질 때까지
독을 품고 있었던 너
어느 누구도 쉬이 건드릴 수 없는
농염한 자태
꿋꿋이 변색하며 검붉어질 때까지
등을 기대었던 황금 토양에서
발가벗겨진 채 내밀었다
점막을 찌른다
반질반질하게 잘생긴 것들
볼품없이 척추가 휜 것들
하나의 집념만으로 모였다
이제는 비틀리고 꼬여도
알알이 떨어뜨리며 내려놓는
씨앗들의 합창, 좌르르
참고 참다 이제는
노랗게 흘려보내도 좋은 씨앗들
고추의 눈물인가
나의 눈물인가
-박세영, 「씨앗들의 합창」 전문
박세영의 시 「씨앗들의 합창」은 이번 의사시인회 12집의 표제시이다. 고추를 소재로 하여 생명과 고통, 그리고 그 안에서의 희망을 다룬 시이다. 고추가 겪는 변화를 통해 인간의 삶과 고난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첫 연에서는 붉게 물든 고추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말라 뒤틀렸다 붉디붉게”라는 진술에서 고추가 마르고 붉어지는 과정을 묘사하며, “진홍빛 저고리”는 고추의 강렬한 색감을 형상화한다. 이는 고추가 겪는 고통과 함께, 그 강렬한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있다.
고추는 “매웁디 매운 마음을 품고서” 자신이 지닌 고통과 집념을 나타낸다. 이는 삶의 고난을 견뎌내는 인간의 모습과 겹친다. “노란 꿈을 저미고 저며 야위어도”라는 태도는 꿈과 희망을 잃어가는 과정에서도 생을 포기하지 않는 고추의 집념을 보여준다.
고추는 “어느 누구도 쉬이 건드릴 수 없는 농염한 자태”를 지닌다. 이는 신산스러운 현실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검붉어질 때까지” 변색하며 삶의 끝까지 버티는 모습은 인간의 굳은 의지를 상징한다. 이는 고추가 “황금 토양”에서 자라나는 것처럼, 결국 고난을 이겨내고 성숙해지는 과정을 보여주지만,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성장통인 것이다. “발가벗겨진 채 내밀었다”라는 진술은 고추가 씨앗을 내놓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관능적인 면모와 함께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고 있다. 고난을 통해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과정에서 “점막을 찌”르는 행위는 필연적인 고통을 수용성을 의미하고 있다.
씨앗들은 “반질반질하게 잘생긴 것들”과 “볼품없이 척추가 휜 것들”로 묘사된다. 이는 다양성의 존재들이 모여 하나의 생명력을 이루는 여정을 나타낸다. “하나의 집념만으로 모였다”라는 구절은 이들이 고통을 견디며 함께하는 힘을 강조한다.
마지막 연에서는 씨앗들이 “비틀리고 꼬여도 알알이 떨어뜨리며 내려놓는” 모습을 통해, 고난을 이겨내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과정을 묘사한다. “씨앗들의 합창, 좌르르”는 그들이 하나 되어 만들어내는 생명력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참고 참다 이제는 노랗게 흘려보내도 좋은 씨앗들”은 이제는 고통을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고 있을 터이다. 고추의 눈물이 “나의 눈물인가”라는 질문으로 끝나는 시는, 고추와 인간의 삶을 동일시하며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씨앗들의 합창」은 고통 속에서도 생명과 희망을 잃지 않는 존재의 이유와 아름다움을 강조하며, 고난을 견디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작품이다.
인간의 질병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의사는 의학의 과학적 특성과 더불어 희로애락과 다양한 감성을 지닌 인간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항상 상기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 이해의 접촉점인 인문학과 그 바탕이 되는 문학에 관심을 주어야 완전한 의사로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좌뇌파로서의 과학자와 우뇌파적인 감성과 인문학을 두루 겸비해야 환자에게는 이해심 많은 훌륭한 의사, 자신에게는 편향되지 않으면서도 자유를 향유하는 행복한 의사가 될 수 있을 터이다.
한국의사시인회 결성 12년이 되었다. 회원들이 모여 첫 시집 『닥터 K』를 펴낸 이후 열한 권째 시집이다. 의사의 일상은 그리 한가로운 것이 아니고 그 틈새 시간에 시를 생각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말같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전국의 훌륭한 의사 시인들이 밤잠을 밀어두고 섬세한 인간애를 시의 행간에 심어 놓은 것을 살필 기회가 왔다. 과학자인 의사가 어떻게 환자라는 인간의 고통과 불안을 함께 아파하고 또 함께 눈물 흘리는지를 볼 기회가 왔다.
더불어 의사라는 인간이 목석이 아니고 어떻게 자신의 의지를 지키며 불완전한 자신을 깨워 이겨나가는지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시를 사랑하는 이런 모임과 꾸준한 시집 발간은 이 나라에 의료문화를 널리 전파하고 의사의 질을 높이는 데도 한몫을 하리라는 믿음을 준다.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詩를 사랑하는 의사들이 함께 모였다. 아직 詩는 탄생하지 않았고,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서문
2024년 봄, 개화 시기가 조금 늦어졌다.
날씨도 우울하고 꽃들도 우울하고 뉴스도 우울하다. 의료 대란이라 하기도 하고 의정 갈등이라 칭하기도 하는, 집단 우울증의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단단히 마음을 추수려보지만 쉽게 빠져나오기 힘들 것 같다. 꽃들이 길을 만들지 않고 새들이 둥지를 떠나면 진한 녹음도 푸른 죄수복처럼 무거워진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에서 우리는 조금씩 시들어간다.
2024년 여름, 사화집 발간이 조금 늦어졌다.
야생의 꽃들이 들판 여기저기에 피어 있다. 만나면 반갑고 못 만나도 가슴 설렌다. 하수상한 시절, 가장 잘한 건 언어의 집 한 채 지은 것이다. 詩는 보이지 않던 긴 터널의 시간이었다. 묵언의 시절에 뿌려 놓은 씨앗들의 합창이다.
지난해 이어 올해도 사화집 발간에 도움 준 황금알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늘 격려와 용기를 주신 마종기 시인과 이원로 시인, 무거운 마음을 기꺼이 열어주신 회원들께 감사 인사 올린다.
2024년 6월
한국의사시인회 회장 김연종
시인의 말
기후 변화로 인하여 자연의 질서가 무너져 비정상의 세상이 되어버린 지금, 자연의 진리를 깨우치고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공존하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새 생명을 바라보듯 파릇하게 다가온 희망을 사유라는 틀로 시를 쓴다.
속도 경쟁의 시대에 느리게 걸어 보는 여유와 함께 - 박세영
우울한 시절이다. 우울한 처방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우울한 봄날을 통과하려면 과열된 심장에 냉각수를 보충하고 메마른 전두엽에 감성을 수혈해야 한다. 알약의 개수가 자꾸 늘어간다. 햇빛 찬란한 봄의 난간을 조심해야 한다. - 김연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