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건 지구가 멸망할 징조가 아니었다.
엘자가 돌아왔다는 징조였고, 나를 향한 엘자의 명령이었다.”
사춘기의 풋사랑을 올올히 묘사하며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강지영 작가의 성장 소설
『심여사는 킬러』, 『프랑켄슈타인 가족』 등의 소설을 통해 폭넓은 인간 군상을 포착하여 걸출한 이야기꾼의 면모를 보여준 작가 강지영의 세 번째 장편소설이 자음과모음에서 새 옷을 입고 출간되었다. 순진한 열두 살 소년이 아름답고 이상한 소녀 엘자를 만나면서 사춘기를 맞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이 성장소설은 개발 전 파주를 배경으로 하여 시골 마을 이웃들의 은근한 따스함과 유머가 가득한 이야기다. 작가는 우리가 지나쳐온 근과거의 풍경을 생동감 넘치는 고유어로 묘사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한국문학의 다채로운 맛을 살린다. 이제는 스릴러, 액션, 오컬트 등으로 지평을 넓힌 강지영 작가의 초기작을 다시금 선보이며, 작가가 가진 깊은 내공이 담긴 이 장편소설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첫사랑의 쌉쌀한 맛이 여전히 유효함을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단순하고 견고한 소년 시절이 저물고
아름답지만 잔인한 어른의 세계로 발을 떼던 열두 살의 겨울,
그의 앞에 엘자가 나타났다
『심여사는 킬러』, 『프랑켄슈타인 가족』 등의 소설을 통해 걸출한 이야기꾼의 면모를 보여준 작가 강지영의 『엘자의 하인』이 자음과모음에서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이제는 스릴러, 액션, 오컬트 등의 무궁무진한 스펙트럼을 가진 강지영 작가의 초기작을 지금 다시 선보이는 이유는, 작가가 가진 깊은 내공이 담긴 이 장편소설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첫사랑의 쌉쌀한 맛이 여전히 유효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순진한 열두 살 소년이 아름답고 이상한 소녀 엘자를 만나면서 사춘기를 맞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이 성장소설은 개발 전 파주를 배경으로 하여 시골 마을 이웃들의 소소하고 구수한 이야기를 담는 동시에, 생동감 있는 풍성한 고유어를 사용해 한국문학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감정과 분위기를 그려나간다.
남자 같은 엄마와 여자 같은 아빠,
치매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외할머니
평온하고 잔잔한 파주 시골 마을의 소년에게
갑작스레 나타난 크고 푸른 눈동자를 지닌 엘자
『엘자의 하인』의 주인공 양하인은 도시 개발 이전의 파주에 살고 있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열두 살의 하인은 도시 개발 이전의 파주에 산다. 하인의 가족은 제법 특이한데, 엄마가 보일러 수리 일을 하며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아빠는 살림과 뜨개질을 한다. 함께 사는 외할머니는 치매로 정신이 들락날락해 싫었다가 좋았다를 반복하게 한다. 하인은 종선이라는 가겟집 아이와 친하게 지내며, 아옹다옹한 소년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인이네 집 바깥채에 묘한 모녀가 세를 들어오며 마을에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바깥채 모녀는 시내 술집에 출근하는 혼혈 여성 스텔라와 그녀의 딸 엘자다. 하인과 동갑이라는 엘자는 검은 머리에 하얀 피부에 새파란 눈을 가졌다. 엘자는 작년에 죽은 하인이의 개 컴온과 똑같이 생긴 개를 데리고 온 데다, 그 개의 이름조차 하인이다.
소녀는 엄마인 외국 여자를 그대로 줄여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꼭 하나 전혀 닮지 않은 곳이 있었다. 그건 그 애의 눈동자였다. 엘자는 양배추 인형처럼 크고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색깔의 눈동자로 남들처럼 보고 읽을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_본문 중에서
엘자는 밖에 나갈 때는 늘 검은 선글라스, 검은 스타킹에 장갑을 착용한다. 이 낯선 모녀 덕분에 작은 마을은 순식간에 수런거리기 시작한다. 스텔라에게 반한 동네 아저씨들은 과잉 친절을 베풀고, 하인이를 비롯한 소년들은 엘자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모녀에게 이성으로서 반한 남자들은 정성을 쏟지만, 모두가 모녀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다. 스텔라가 지나가면 양공주라는 뒷말이 나고, 엘자는 남다른 외모에 새까만 차림 때문에 아이들 사이에서 마녀라는 소문이 돈다.
엘자는 자신을 눈앞에서 욕하는 아이들에게 화가 나면 붉은 입술로 이상한 주문을 외운다. 그 주문을 들은 아이들은 팔이 부러지거나 물에 빠지거나 하는 등 나쁜 일을 당한다. 무섭지만 이상하게 신경 쓰이는 소녀 엘자. 하인은 엘자가 마녀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첫사랑의 환상 속에서 펼쳐지는
소년과 소녀의 아릿한 성장담
삶에 누군가가 등장하면 누군가는 사라지는 법. 하인의 외할머니가 어느 날 온데간데없이 증발하고, 하인은 마치 어른처럼 외할머니의 방을 차지해 혼자 생활하게 된다. 할머니를 돌보던 시간이 사라지면서, 하인은 엘자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엘자의 비밀을 알게 된다. 엘자는 자칫해서 햇볕을 쬐면 피부에 반점이 생기고 빈혈 증세를 보였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오직 마을에 셋뿐이다. 하인이는 저도 모르게 엘자의 하인 역할을 하게 된다. 친구를 사귀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는 엘자와, 어리숙한 소년 하인의 관계는 하인이 매일 엘자의 양산을 들어주며 점차 친밀해진다.
엘자가 내게 몸을 기대고 걷는 지금 이 순간, 어째서 그때 마셨던 코코아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지 알 수 없었다. 함께 걸을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마디게 쓰고 싶었지만 그러기에 엘자는 너무나 지쳐 보였다. 그 애의 옆얼굴이 눈이 부실 지경으로 빛났다. 그 빛이 너무나 찬란해, 나는 차마 그 애를 바로 보지 못했다.
_본문 중에서
하인은 엘자를 바라볼 때마다 “어째서 몸이 주인을 배신하고 제멋대로 노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따끔따끔한 마음이, 그 애의 얼굴이 빛나는 것이, “가슴이 짜르르하고 온몸의 관절이 삐걱대는 동시에 소름이 빽빽이 돋아”나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된다. 하인은 “혹시 엘자가 내게 마법이라도 건 걸까. 삼장법사가 오공이 머리에 금고아를 씌워 꼼짝 못하게 했던 것처럼, 엘자 역시 제멋대로 나를 부리기 위해 맘속으로 주문이라도 외웠는지 모른다”라고 생각하지만, 그저 소년은 삶에 등장한 소녀 엘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첫사랑과 격동하는 집안 사정 사이에서 하인의 단순한 소년 시절이 끝나고, 아름답지만 잔인한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그러던 겨울, 사라진 외할머니가 돌아온다. 이제는 다른 이가 떠날 시간. 엘자는 이 마을과 하인에게 안녕을 고한다.
강지영 작가는 2013년에 출간한 이 작품을 개정하며 결말을 고쳐 썼다. 십 년 만에 다시 마주한 엘자와 하인의 결말을 바꾸는 것은 “실은 계획하지 않은 일이었다. 개정 제안이 닥친 뒤에야 원고를 천천히 다시 읽고, 문득 그리고 언뜻 뭔가가 떠올라 실행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얘, 인생은 말이다, 닥치는 대로 사는 거야. 우는 것만큼 가치 없는 일이 없어”라고 말해주었던 외할머니의 말씀을 떠올렸다고 한다.
『엘자의 하인』은 우습고도 사랑스러운 인물들과 개발 직전 시골 마을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통해 우리가 겪어온 각자의 성장기를 다시금 기억하게 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어린아이의 세계가 끝나고, 어른이 된다는 경험은 살면서 모두가 하게 된다. 그사이 우리의 곁에서 단단할 것만 같았던 어른은 허물어지고, 마냥 연하고 부드럽기만 하던 아이의 마음에는 서서히 굳은살이 생겨난다. 어느 “순간만큼은 모녀의 역할이 바뀐 것처럼 엘자는 어른처럼 커 보였고, 스텔라 아줌마는 아이처럼 작아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된다.
작가의 말
열린 부엌문 틈으로 강아지가 뛰어들어왔다. 누가 낳은 새끼이며 무슨 색이고 얼마만 한 크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강아지가 뛰어와 순식간에 내 다리를 타고 부뚜막으로 뛰어 올라와 가마솥에 빠졌다는 사실만 몽타주처럼 남아 있다.
명이 짧아 그랬지, 할머니는 강아지를 커다란 양푼으로 떠내 감나무 아래 묻어주었다. 나는 사고를 막지 못한 죄책감에 자꾸 울었다. 올해는 왜 조청도 엿도 없냐고 물어볼 가족들에게 대꾸할 말도 찾지 못했다. 곁에서 할머니가 해준 말이 있었다. 얘, 인생은 말이다, 닥치는 대로 사는 거야. 우는 것만큼 가치 없는 일이 없어.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작품을 개정하며 결말을 새로 썼다. 실은 계획하지 않은 일이었다. 개정 제안이 닥친 뒤에야 원고를 천천히 다시 읽고, 문득 그리고 언뜻 뭔가가 떠올라 실행했을 뿐이다. 이제야 할머니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조금 알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