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 문학에서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드물던 시절부터 자신만의 작품 세계로 독자와 평단 양쪽 모두로부터 찬사를 받아온 작가 오정희의 『활란』은 다양한 매체에 발표해온 짧은소설 42편의 모음집이다. 일찍이 이상문학상(1979), 동인문학상(1982) 등을 수상했고 2003년엔 장편소설 『새』로 독일 리베라투르상을 수상하여 최초로 해외 문학상을 받은 한국 작가로 기록된 오정희는 이후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가능성의 지평을 넓혀준 대명사가 되었다. 『활란』에 실린, 오정희 작품 세계의 이야기 씨앗이자 이야기 편린이라 할 짧은소설들은, 이 책의 작품 해설을 쓴 소설가 장정일의 말대로, “오정희의 비밀스러운 개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작가의 이름난 단편소설이 쌓아올린 세계관의 조각을 간직하고 있다.” 잘 알려진 작가 특유의 유려한 문장은 이 안에서 특별히 더 재미있고 경쾌하게 읽힌다.
목차
작가의 말 짧은 것의 의미
1 나는 누구일까
부부
아내의 가을
아들이 좋은 것은
나는 누구일까
간접화법의 사랑
복사꽃 그늘 아래서
비 오는 날의 펜팔
상봉기
요즘 아이들
해산
방생
고장 난 브레이크
2 건망증
506호 여자
건망증
세월은 가도
어떤 자원봉사
그 가을의 사랑
아내의 외출
병아리
한낮의 산책
꽃핀 날
소음공해
3 떠 있는 방
사십 세
은점이
꽃다발로 온 손님
아내의 삼십 대
떠 있는 방
맞불 지르기
결혼반지
금연선언
낭패
4 서정시대
돼지꿈
치통
독립선언
자라
서정시대
휴가
골동품
보약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한밤의 불청객
긴 오후
작품해설(장정일) 개척자였던 오정희
작가
오정희
출판사리뷰
이것이 ‘나’인가
내가 정말 살고 싶었던 것이 이러한 생이었던가
책 제목인 ‘활란’은 수록작 「사십 세」의 주인공 이름이다. 지난 세대에게 ‘당당한 선각자의 표상’이었던 ‘김활란 박사(1899~1970)’를 본받으라는 뜻에서 주인공의 부모가 지었다는 그 이름은 이 책의 타이틀인 동시에, 이 짧은소설들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인공들의 내면을 관통하는 이름이다. “먼 세월 저쪽 푸르렀던 날들,” 자신의 이름으로 무엇인가 되겠다는 꿈이 있던 사람들, “모든 것이 가능성 그 자체로 남아 있던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평범하면서도 삐걱대는 ‘현재의 이야기들’이 『활란』을 이룬다. 지난 과거의 꿈은 “가파르게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흐르는 물살에 돌이 닳아지듯 삭아들”고 이제 세상에 적응해가는 이야기들이. 아이들의 성적지수에 천국과 지옥이 갈리는 여성(「아내의 가을」), 아이들이 공부한다고 제 방들로 들어가 버리는 것에 불만인 남편(「요즘 아이들」), 며느리의 규모 없고 헤픈 살림을 나무라는 시어머니(「나는 누구일까」), 십 대 시절의 한 소녀에 대한 환상을 여전히 간직한 중년 남성(「정애」), 곗돈 타고 집 안에서 당당한 주부(「건망증」), 아이들을 집에 둔 채 자원봉사에 헌신하는 여성(「어떤 자원봉사」), 아이들과 놀아주는 젊은 청년에 괜스레 가슴 설레는 여성(「그 가을의 사랑」), 아내가 자기 삶을 돌아보며 새 계획을 모색할까 좌불안석인 남편(「아내의 외출」), 꽃망울 터지는 것 바라보다 가족들 아침밥을 태운 주부(「꽃핀 날」), 친구의 독립선언 소식에 귀를 쫑긋 세운 동창들(「독립선언」), 골동품을 가보로 두기보다 박물관에 기증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소년 같은 얼굴의 남편(「골동품」), 어머니에게서 받은 보약을 자기는 안 먹고 남편에게 달여주는 딸(「보약」)……. 이들은 『활란』의 짧은소설들 안에서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으로, 삶의 표면을 보여주고 또 이면을 들춰준다.
한국 여성들은 물론 성별과 세대별을 초월,
큰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우리의 이야기, 혹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이야기
이 책의 이야기들은 ‘과거를 보내고 현재를 사는 이들’의 다양한 이야기인 한편으로, 현재의 독자들에게 이미 지나간 이삼십 년 전의 이야기이다. 이 시절에 중년을 통과한 『활란』의 여性인물들은, ‘활란’이란 이름이 표상하는 당당함과 새로움과 도전성을 꿈꾸면서도 오래된 기존의 규율과 가치관이 내면화된 세대에 속한다. 한때 다른 것을 꿈꾸기도 했으나 지금 안정적으로 편입된 그들의 땅은 이후 세대들에게 안전한 삶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그 이삼십 년 전 인물들의 흔들리는 마음들이 『활란』의 곳곳에 그려져 있다. “설명하기 힘든 굴욕감”이나 “권태와 무의미와 우울”로 드러나기도 하는 이것에 대해, 장정일은 미국의 여성학자 베티 프리단의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을 인용하며 설명한다. 그 병은 “결혼 전에 진취적이고 독립적이었던 여성일수록 더욱 가혹하게” 덮쳐왔다고. 40대 전후 여성의 삶을 그린 오정희의 공감 소설 『활란』은, 시대와 성별을 초월한 우리의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고, 시대성을 그대로 드러낸 채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는 다층적인 텍스트이다. 한국 문학의 큰나무와도 같은 작가 오정희의 삶과 사유의 족적이 기록된 짧은소설집 『활란』은 어쩌면 서로 다른 세대, 성별, 계층의 마음들을 가만 헤아려볼 실마리를 건네 줄 것이다.
현관문을 나서는 아이를 몇 번이고 불러 세워 손수건, 신발주머니, 도시락 가방을 건네주며 나무랐다.
“이렇게 칠칠맞고 정신이 없어 시집가서 살림하고 살겠니”
“전 시집 안 가요. 누구 고생시키려고”
무쪽 자르듯 분명하고 당당한 대답에 나는 괜히 통쾌해졌다. 좀 전 당당히 물을 요구하던 아들에게서 느꼈던 굴욕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아이들과 남편에게 종종 어미를 종처럼 부리려 한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지만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커다랗고 뻣뻣한 운동화 짝을 한없이 문지르며 빨 때, 방마다 널린 이부자리를 갤 때, 특히나 텔레비전을 보며 희희낙락하는 가족들 앞에서 엉덩이와 등허리를 보이며 엎드려 걸레질을 할 때면 설명하기 힘든 굴욕감을 느끼곤 했다. (「나는 누구일까」에서)
“‘짧은 소설집’이라 이름 붙인 이 책에는 낮은 담장 안쪽,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린 소소하고 평범한 삶의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무심결에 눈에 들어온 정경이나 당연하고 친숙한 나날 중의 어느 순간 느닷없이 맞닥뜨린 생의 낯선 얼굴, 감히 심연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는, 세상과 삶의 미세한 균열들이 이러한 글들을 짓게 한 빌미가 되었다. […]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이나 적막감, 외로움이 또한 힘이 되지 않았던가.”_「작가의 말」에서
현모양처로 아이들을 탈 없이 키우고, 남편을 도와 자기 집과 자가용까지 마련했으니 행복해야 할 텐데, 『활란』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은 전혀 그런 기색이 아니다. […] 집과 남편과 아이에게서 여성의 신비스러운 경험을 하지 못하는 나는 나쁜 여자가 아닌가 […] 오정희가 개척했던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에 걸린 여성들에 대한 탐구는 이후로 젊은 여성 작가들에게 깊고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며,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에 이르러 대중적인 폭발을 일으켰다._장정일, 「작품 해설」에서